조용히 눈물이 맺히는 장면엔 늘 피아노가 흐른다.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, 어떤 음악이 나오면 우리는 준비된 듯 감정을 흔들린다. 그것은 정제된 슬픔이다. 피아노의 건반 위로 흐르는 선율이 대사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. 설명은 필요 없고, 해석도 필요 없다. 단지 그 음악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감정이 된다.
피아노는 영화 음악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악기 중 하나다. 특히 슬픔을 다루는 장면에서는 거의 늘 등장한다. 이유는 간단하다. 피아노는 공간을 방해하지 않는다. 과장되지 않고, 과묵하게 감정을 전달한다. 음 하나하나가 침묵과 맞닿아 있고, 그 사이의 여백은 오히려 감정을 더 깊게 만든다.
피아노는 울지 않는다.
다만 조용히 곁에 있다.
'원스'에서 흐르는 Falling Slowly는 사랑과 이별, 시작과 끝이 겹쳐진 순간에 울리는 피아노다. 그 단순한 멜로디가 인물들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고, 관객에게는 침묵 속에서 마음을 울린다. 한 곡이 그들의 관계를 정리하고, 영화 전체의 톤을 남긴다. 이 곡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 남아, 듣는 이의 일상까지 물들이곤 한다.
'타오르는 여인의 초상'에서는 피아노 대신 클라비코드와 무반주 합창이 등장한다. 하지만 그 분위기는 피아노가 주는 고요함과 닮아 있다. 특히 마지막 장면,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음악을 듣고 있는 인물의 표정은, 우리가 음악이 없었다면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감정의 절정이다. 음악은 말이 아닌 감각으로 감정을 전하고, 우리는 그 앞에서 무방비가 된다.
슬픔은 반드시 크게 울릴 필요가 없다. 오히려 가장 조용한 소리가 가장 깊은 슬픔을 말해준다. 피아노는 그 조용함의 상징이다. 한음 한음이 고백처럼 다가오고, 침묵과 나란히 걷는다. 그래서 피아노는 감정을 억누르지도 않고, 쏟아내지도 않는다. 그냥 거기, 감정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뿐이다.
그래서 우리는 슬픈 장면이 지나도, 그 피아노 소리를 기억한다.
장면은 끝났지만, 피아노는 계속 마음속에서 울린다.
그 감정은 우리가 떠나지 말라고 붙잡은 것이 아니라,
음악이 먼저 우리 곁에 남아준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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